프루티거 에어로와 아사달의 이야기
― 아사달 대표 서창녕 인터뷰 (2026.05.27)
모니터 밖으로 뛰어오르는 물고기, 반짝이는 물방울과 지구본, 생기 넘치는 초록빛 잔디와 푸른 하늘의 부드러운 그라데이션. 이제 우리는 웹을 떠돌며 마주한 ‘프루티거 에어로(Frutiger Aero)’ 와 사실상 동의어가 된 이 스톡 이미지들을 익히 잘 알고 있다. 이 이미지들에는 한국의 웹 및 스톡 이미지 기업 ‘아사달’에 대한 짧은 설명이 덧붙지만, 정작 이 기업의 역사와 배경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번 인터뷰에서 디자인 연구자 양윤선은 아사달 대표 서창녕과 함께, 웹 환경에서 탄생한 이미지들이 어떻게 ‘디자인 공장’ 안에서 체계적으로 생산되었는지, 동아시아 전역과 그 너머로 어떻게 확산했는지, 그리고 스마트폰의 등장과 미니멀 디자인의 부상 속에서 어떻게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돌아올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해서 들여다본다. 한국이 정보화 사회로 급속히 전환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프루티거 에어로의 상당 부분을 구성했던 아사달의 디자인몰에 대한 드문 이야기를 출발점에 있었던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전하고자 한다. — 소피 시안 (Sofi Xian)
English version available here
스톡 이미지 산업의 탄생
양윤선 —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프루티거 에어로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2000년대 중후반에 유행했던 미학으로 당시 디지털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에게 디지털이 친숙하게 느껴지기 위해 자연적인 요소가 디지털과 잘 어우러진 모습이 특징입니다. 아사달의 당시 스톡 이미지가 프루티거 에어로를 설명하기 좋은 예시인데요, 그중 제일 유명한 이 이미지를 기억하시나요?
서창녕 ▶ 아주 익숙한 이미지입니다. 이미지 속 모니터는 우리 회사에서 실제로 사용하던 모니터입니다. 그리고 위에 갈매기 보이시나요? 제가 직접 찍은 사진인 것 같습니다. 당시 갈매기 사진을 많이 찍곤 했는데, 그중 하나인 것 같네요. 나머지 부분은 모두 직접 그린 것입니다.
— 아사달 회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아사달을 조사하다가 창업 후 14년에 대한 회고1라는 회장님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아사달의 10가지 신규 사업 중 디자인몰이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당시 직원들과 회장님 생각은 어떠셨는지, 성공할 거라 예상하셨나요?
▶ 1998년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아사달 개인회사를 창업하고 약 2년 뒤 2000년 초 법인으로 설립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닷컴 버블 현상이 나타나고, 코스닥 시장이 급부상하면서 저희의 인터넷 사업이 굉장히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도메인 등록 서비스와 웹호스팅 서비스 두 가지를 주력으로 시작했는데요. 이 서비스를 이용한 고객들은 자연스럽게 웹사이트 구축을 필요로 했는데, 여기에는 중소기업과 대기업, 정부, 공공기관 그리고 시민 단체 등 다양한 주체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000년대에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열풍이 한창이었습니다. 웹사이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웹 주소인 도메인이 필요했고, 자체 서버를 구축하기에는 비용 부담이 컸기 때문에, 많은 고객이 아사달을 통해 홈페이지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객들로부터 홈페이지 디자인도 제작해 줄 수 있느냐는 문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작은 가능했지만, 디자인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고 한 사람이 생산할 수 있는 양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는데, 한 디자이너가 만든 아이콘을 다음 디자이너가 비슷하게 다시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작업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를 아주 잘 만들어서 여러 사람이 재사용할 수 있다면 생산성이 훨씬 높아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때가 2003-2004년 무렵, 회사를 시작한 지 4~5년 정도 지나면서 직원 수가 약 30명 규모로 커졌고, 사업도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터넷 쇼핑몰, 게임, 영화 등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들이 빠르게 등장하고 있었고, 우리는 10개의 신규 사업을 시작했는데요, 그중 대부분은 실패하고, 유일하게 디자인몰이 성공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사실 이 사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시장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팀장 1명, 직원 2명, 그리고 저까지 총 4명이 이 사업을 맡아 시작했는데, 디자인몰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서버에 기록된 다운로드 수도 순식간에 증가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이 사업을 확장해야겠다는 판단에, 팀을 확장하고 디자이너를 추가로 채용했습니다.
우리가 맨 처음 제작한 제품은 일러스트 아이콘이었습니다. 이는 완성된 형태의 웹디자인 템플릿이라기보다는, 웹페이지에서 흔히 사용되는 반복적인 인터페이스 요소들, 즉 공지 아이콘, 마이크, 스피커, 게시판, 댓글, 답글 버튼 등을 말합니다. 특히 이 아이콘들은 일러스트 기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사용자가 원본 파일을 다운로드해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었고, 크기 역시 손쉽게 변경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직접 제작하는 비용에 비해 10분의 1, 심지어 100분의 1 수준으로 저렴하게 판매했습니다. 당시 웹디자이너로서는 본인이 직접 만들 때보다 저렴한 가격에 수십, 수백 개의 아이콘 세트를 한 번에 다운로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업무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로서도 효율적인 구조였습니다. 더 이상 매번 맞춤형 디자인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이, 하나를 잘 만들어두면, 제작에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같은 소스를 수백, 수천 번 반복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홈페이지에 필요한 웹 요소들을 고품질로 제작해 저렴한 가격에 일회 사용권 형태로 제공했고, 웹디자이너들은 이를 활용해 작업 시간을 크게 단축하면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일종의 윈윈 구조가 형성되었죠.
웹 환경을 위한 디자인
그러다 보니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어떤 색감과 이미지가 더 선호되는지가 중요했습니다. 당시 기존 디자인 소스 업체들은 주로 인쇄 기반의 작업 방식에 익숙해 색을 더할수록 어두워지는 감산혼합(CMYK) 방식에 익숙했습니다. 반면 웹에서는 작동 방식이 다르죠. 색을 더할수록 밝고 선명하게 표현되는 가산혼합(RGB)을 사용합니다. 많은 기존 업체가 이러한 웹 환경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웹만을 위한 이미지를 제작했기 때문에 훨씬 밝고 선명한 색감을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IT 관련분야에 우리의 작업물이 자주 활용되어 자연스럽게 디지털 첨단적인 분위기의 이미지를 만들게 되었죠.
특히 가장 눈에 띄는 색은 파란색이었습니다. 인쇄 환경에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선명한 파란색이 모니터에서는 RGB 방식 덕분에 훨씬 밝고 아름답게 구현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미지에 파란색 배경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대표적인 물고기 이미지도 역시 푸른 배경을 사용했네요. 오랫동안 인쇄 기반 사업을 운영하던 업체들은 이런 색감을 구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쉽게 따라오지 못했었고요, 웹 기반으로 하는 업체들이 등장하면서 유사한 서비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아이콘만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이미지, 사물, 배경, 일러스트까지 제작 범위를 넓혔고, 나중에는 웹 화면 전체를 구성한 홈페이지 템플릿까지 제공했습니다. 상단 메뉴 구조와 하위 메뉴 체계를 포함한 메인 페이지와 서브 페이지 세트를 제작해 거의 완성된 형태의 웹사이트 샘플을 다운로드 받을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용자들은 텍스트만 자신들의 내용으로 바꾸면 홈페이지를 완성할 수 있었죠.
당시 널리 사용되던 플래시(Adobe Flash) 소스도 함께 제작하며 서비스 분야를 확장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러스트 아이콘으로 시작했지만, 이후에는 수채화 질감을 표현할 수 있는 페인터(Painter) 기반 이미지까지 제작했습니다. 선택지가 다양해지면서 한국의 웹디자이너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트로 모여들기 시작했었습니다.
또한 일러스트, 페인터, 사진 등 다양한 요소를 레이어 단위로 분리한 뒤 ‘편집사진’이라는 형태의 완성본으로 판매했습니다. 사용자는 파일을 열어 물방울만 따로 쓰거나, 모니터, 물고기, 지구본 같은 요소를 각각 분리해 자유롭게 재조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높은 편집 자유도 덕분에 시장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디자인 스타일은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미래지향적이고 디지털적인 분위기, 공상과 현실이 섞인 듯한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자인 공장
— 그렇다면 스톡 이미지를 제작하는 다른 기업들도 존재했었군요?
▶ 물론 있었습니다. 저희는 시장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확보했고, 한국의 많은 웹디자이너들이 자연스럽게 아사달을 이용하게 되면서 비슷한 서비스를 운영하던 경쟁사들은 점점 어려움을 겪게 되었죠. 그래서 직접 해당 회사들을 찾아갔고 서비스 구조가 상당 부분 중복되는 상황에서 계속 경쟁하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해, 결국 수억 원 규모의 인수 자금을 들여 회사를 인수하게 되었습니다.2 그렇게 서비스가 통합되면서 우리는 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고, 한국에서는 압도적인 1위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우리 이미지를 사용해 보지 않은 디자이너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거든요.
그 방대한 이미지들은 CD 패키지 형태로도 판매되었습니다. 한 장의 CD 안에는 수천, 수만 장의 이미지가 들어있었고 아마 60개가 넘는 CD 시리즈를 제작했을 겁니다. 당시 디자이너들에게 디자인 소스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가는 곧 경쟁력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디자이너들이 회사에 입사할 때 “아사달 디자인 소스 CD를 지원해 주시나요?”라는 질문이 근무 조건처럼 따라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구매한 소스는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재활용되며 새로운 작업에 활용됐습니다.
회사가 가장 성장했을 때는 디자이너만 100명이 넘었고, 전체 직원 수는 160명 정도였습니다. 그중 100명 이상이 디자인 이미지 소스를 제작하는 디자이너였습니다.
디자인 사업부는 홈페이지 시안을 제작했고, 콘텐츠 부서는 각각의 디자인 요소와 소스를 만드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직원 구성은 여성 비율이 높았고, 주로 20~30대가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회사 분위기도 매우 활기찼습니다. 사업 성과가 좋았기 때문이죠.
다만 디자인 결과물의 품질은 초기에는 천차만별이었습니다. 품질 표준화를 위해 여러 명의 팀장을 두고, 회사 스타일과 맞지 않거나 지나치게 특이한 작업은 판매하지 않았습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통과한 디자인만 최종적으로 판매했고 그 결과 기본적으로 일정 이상의 품질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반응이 좋은 디자인 소스는 상당한 수익을 내기도 했는데요, 어떤 디자인은 그 하나만으로도 수천만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고, 성과급 제도를 운용해 디자이너 개인에게 포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월급보다 성과급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덕분에 디자이너들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트렌드를 연구하고 해외 사례를 참고했으며, 내부적으로도 경쟁이 매우 치열했습니다. 더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디자인 세미나와 기술 토론도 자주 열리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했습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디자인은 예술성이 높은 디자인이 아니라, 고객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디자인이었습니다. 다운로드 수와 판매 금액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누군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시장 반응이 좋으면 모두가 그 스타일을 따라 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그림자 효과가 인기를 얻으면, 수많은 디자이너가 동시에 이를 활용한 디자인을 제작하는 식이였죠. 그 결과 스톡 이미지 시장이 순식간에 아사달 스타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좋은 말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는데 디자인 회사가 아니라 디자인 공장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스타일 하나가 등장하면, 수많은 디자이너가 동시에 그것을 발전시켜 생산했기 때문이지요.
—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있었나요?
▶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죠. 신입 디자이너들은 입사 후 회사 스타일에 맞는 디자인 교육을 받았고요, 성공적인 디자인 예시를 모아 매일 디자인 세미나를 진행하고, 내부 토론을 통해 가이드라인을 지속적으로 정리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준을 바탕으로 디자인하다 보니, 어떻게 100명이 넘는 디자이너가 마치 한 사람이 만든 것처럼 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아사달 이미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서, 딱 보면 아사달 이미지임을 알아볼 수 있었거든요. 그것이 우리 회사만의 특징이었습니다.
동아시아 생산 네트워크
— 그럼 당시 만들어진 합성 스톡 이미지들은 거의 아사달에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 거의 90퍼센트 이상은 우리가 만들었습니다. 한국에 다른 경쟁사가 거의 없었어요. 있었지만 우리가 대부분 흡수했지요. 한국 시장에서는 이미 상당한 규모로 판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 진출을 결정해 2009년 현지에 주식회사를 세우고, 현지 업체인 픽스타와도 제휴를 맺었습니다. 현재는 예전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픽스타를 통해 일부 이미지는 계속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 전에 더 거대한 시장인 중국 지린성 옌지시에 2008년 회사를 설립하고 운영했습니다. 초기에는 판매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일정 시점 이후부터는 수백 건에 달하는 무단 복제 유통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CD를 그대로 복사해 포장만 바꿔 정식 판매보다 훨씬 저렴한 10분의 1 가격에 불법 유통이 더 많아진 상황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판매 조직 중심의 제휴 형태로, 비교적 소규모로 운영했었고요, 중국에서는 현지 디자이너 수십 명을 채용해서 직접 콘텐츠 제작을 진행했었습니다. 이후 남북 관계가 완화되던 시기에는 평양에서도 디자이너 약 30명을 배치해 디자인 작업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하나의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가 형성된 셈입니다.
한국에서 메인 제작을 담당하고, 중국과 평양에서도 일부 제작을 진행한 뒤 이를 다시 한국으로 모아 검수했습니다. 결과물들은 최종적으로 합격, 불합격을 결정하고, 수정이 필요한 부분은 다시 수정해 완성도를 높이고, 완성된 콘텐츠는 아사달 브랜드로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 여러 시장에 동시에 유통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유럽 시장까지도 확장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대만에서는 현지 파트너와의 제휴를 통해 활발한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소수 인원이 시작했지만, 점차 수백 명 규모로 확장되면서 동일한 스타일의 콘텐츠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한 시대의 트렌드를 형성하게 되었고, 사업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아사달 스타일의 종말
— 당시 세계에서 활동하던 디자이너들은 아직도 계신가요?
▶ 지금은 많이 줄었습니다. 디자인 트렌드가 바뀌어서요. 당시에 제가 “유행은 5년 간다”라고 이야기하곤했는데, 새로운 디자인 스타일을 계속 만들어가면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폰이 등장했습니다. 단순 유행의 변화가 아니라 기술 환경 자체가 바뀌어버린 게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비교하면 기기들의 성능이 훨씬 떨어졌고, 인터넷 속도 역시 느려 웹사이트 접속 자체가 부담되는 환경이었습니다. 저희가 제작한 이미지들은 용량이 크고 디테일이 많았기 때문에 스마트폰 환경과 점점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디자인은 3D 실사 기반의 복잡한 이미지 중심에서 플랫 디자인으로 바뀌고, 결국 미니멀리즘이 등장했습니다. 미니멀리즘이 뭐겠어요? 결국 우리가 하던 아사달식 디자인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죠. 웹 환경에서 이미지 자체가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웹 인터페이스는 텍스트 중심의 반응형 웹으로 변화되고 표준이 되었죠. 저희가 만들어왔던 이미지들은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아직도 이런 이미지를 쓰느냐, 촌스럽다”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으며, 모바일 환경에서 데이터 사용량 요금에 대한 부담 때문에 이미지 자체를 최소화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5년 주기의 스타일 변화가 아니라, 기술 구조의 변화였고, 그 결과 이미지 중심의 콘텐츠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디자인 수요도 줄어들었고, 디자이너들의 성과 구조 역시 약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디자인 부서의 규모를 축소해야 했습니다. 현재는 과거와 같은 규모를 유지하지는 못하고,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2000년대 초반의 인터넷 붐 속에서 시대 흐름에 맞춰 빠르게 대응했기 때문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고, 하나의 디자인 트렌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기술환경이 스마트폰 중심으로 바뀌면서, 디자인의 중심도 이미지 보다 기능과 효율로 바뀌게 되어 아사달의 이미지가 수명이 다하게 된 거죠. 다만 최근에는 스마트폰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며 상황이 바뀌는 중입니다. 스마트폰에서 큰 이미지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이미지 중심 디자인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 네, 동감입니다. 저도 그런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이미지를 다시 화려하게 사용하는 시대가 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과거처럼 인간이 대량의 이미지를 직접 제작할 것 같진 않습니다. 이미 아사달 이미지를 레퍼런스로 프롬프트만 입력하면 유사한 결과물을 훨씬 빠르게 생성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성 속도와 생산량 측면에서 인간보다 AI가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에 과거처럼 대규모 디자이너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닌 것 같네요.
낙관주의의 매력
— 회사의 이념이 ‘창조적 혁신기업’, ‘세계 속의 인터넷 기업’이라고 하셨습니다.
▶ 이러한 아사달의 배경이 있어서 그렇게 짓게 되었습니다. 회사 설립 10주년 기념식을 하면서 정리한 경영 이념이었어요. 당시 디자인몰이 가장 잘될 때였고, 국가에서 장관상과 대통령상도 받던 때였습니다.
첫 번째 이념은 ‘고객 중심의 서비스 기업’입니다. 이 디자인을 만든 것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고객입니다. 고객들이 보이지 않는 투표를 한 거죠. 수천 개의 이미지를 올렸을 때 다운로드가 거의 없는 것은 고객이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스승은 디자인 박사나 교수님이 아니라 고객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창조적 혁신 기업’입니다. 고객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디자인을 제안하고 고객이 반응하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한국에서만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하게 확장하는 인터넷 기업이 되고자 ‘세계 속의 인터넷 기업’으로 정했습니다.
— 아사달의 이미지가 굉장히 밝고 긍정적입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 당시 한국의 GDP는 굉장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넷 산업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여서 사회 전체가 꿈과 미래, 희망에 대한 기대감으로 굉장히 들떠있었어요.
한국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던 시기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시절을 지나 산업화 과정에서 일본과 서구를 따라가던 중이었죠. 그래서 우리의 당시 모토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3 는 것이었습니다. 산업화의 영역에서는 뒤처졌을지 몰라도, 정보화와 인터넷 분야에서는 앞서가자는 의지였고, 그 결과 실제로 현재 일본과 유럽보다 더 앞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역전이 이루어진 셈이지요.
당시 한국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인터넷 인프라를 구축해 냈는데, 서울대학교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네트워크 통신에 성공하면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인터넷 기반이 만들어졌고, 이후 김대중 정부가 벤처기업을 육성하고 인터넷 인프라 확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우리의 처지에서는 당시 아직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고 일본이나 유럽은 부유한 선진국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큰 기대감과 활기참으로 가득 찼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기업의 매출이 급증하거나,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졌습니다. 네이버가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다음(현 카카오) 역시 빠르게 영향력을 키워갔고요, NC소프트의 리니지 게임 역시 전 세계적으로 큰 다운로드 수를 기록하며 빠르게 확산했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우울한 이미지가 인기가 있겠습니까? 밝고 맑고 힘차고 희망적인 이미지들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그 흐름에 맞게 이미지를 제작했고,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를 원했던 순환이 잘 만들어지면서 하나의 아사달 스타일이 만들어졌네요.
— 저는 1996년생인데 처음 컴퓨터를 가졌을 때가 이미 윈도우XP 시절이였습니다. 당시 웹 환경 속에서 아사달 이미지를 정말 많이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추억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인터넷 속에서 들떠있었던 감정도 함께 떠오르네요.
▶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진국 국민이 되셨네요. 저는 농경사회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한국의 GDP 순위는 최하위권에 있었고, 심지어 북한보다 가난하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급격히 성장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죠. 이미지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밝고 희망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이 미래에 대한 기대가 컸고 그런 시대상을 반영하는 결과물이 나온 것이지요. 반대로 최근 코로나19 시기처럼 사회 분위기가 우울하고 폐쇄적일 때는 아사달의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죠. 이처럼 시대 분위기에 따라 사람들이 원하는 시각언어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 한국이 AI 산업을 비롯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반도체 같은 종합적으로 기술 산업이 성장하는 흐름을 보입니다. 만약 이런 분위기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다시 밝고 화려한 이미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지 않느냐고 예측해 봅니다.
AI와 스톡 이미지 모델
— 아사달에서도 AI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또 AI를 활용해 디자인몰을 계속 운영할 계획인가요?
▶ 현재 AI 사업에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회사 규모 또한 커져 5개의 계열사와 270명 정도의 직원이 있습니다. 중국에는 회사가 아직 남아 있고, 북한은 정치적인 이유로 중단됐으며, 일본과는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 이제는 인간만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이미지를 다운받아 사용했다면, 이제는 사용자가 그 자리에서 AI를 활용해 이미지를 직접 생성해 사용하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예전에는 모델 사진이 대부분 서양인이었고, 한국인 모델 이미지는 매우 부족했습니다. 연예인 이미지는 비용이 너무 높아 일반 기업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웠고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남녀 모델 100명 이상을 섭외해 수년에 걸쳐 촬영했었고, 그 이미지를 디자인 소스로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AI가 현실보다 더 나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하다 보니, 모델을 섭외할 필요가 없는 상황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렸습니다. AI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 생각합니다. 과거처럼 이미지 소스를 대량으로 제작해 판매하는 방식은 더 이상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 전략이라고 봅니다.
기업 아카이빙
— 아사달의 자료 데이터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혹시 회사에서 내부적으로 별도로 아카이빙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웹사이트만으로는 조금 불안정해 보입니다.
▶ 저희는 데이터를 CD로 백업해서 수백 장의 CD 형태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물론 별도 백업본으로도 저장되어 있고, 서버에도 남아 있습니다. 자료는 다 있지만 오래된 이미지라 기록 및 보관용으로 관리 중입니다.
— 아사달의 이미지 일부가 공유 플랫폼인 공유 마당이라는 곳에 무료로 공개된 걸 보았습니다.
▶ 네,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먼저 제안이 있었습니다. 저작권이 많이 걸려있어서 무단 사용으로 인한 문제를 줄이기 위해 일부 자료를 기부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수억 원 상당의 이미지 자료를 기부했고, 그것이 공유 마당을 통해 무료로 공개된 것입니다. 이 자료들은 비교적 최근에 제작된 이미지는 아니었고, 초기에 대표적이었던 콘텐츠 일부분입니다. 그 외에 아사달 홈페이지에 있는 자료들은 유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프루티거 에어로와 미학의 미래
— 혹시 프루티거 에어로와 관련해 아사달 측에 직접 문의했던 사람이 있었나요?
▶ 학계에서는 없었습니다. 기자들과 방송 관계자들의 문의는 많이 있었지만, 학생이나 연구자들에게서 온 문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사달이라는 기업 자체를 취재하기 위해 접근했었지, 프루티거 에어로에 대해 문의해 온 사람은 없었네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용어였습니다.
— 네 맞습니다. 프루티거 에어로는 이러한 미학적 특징을 지칭하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용어인데요. 소피 시안(Sofi Xian)이라는 연구자가 처음 이 용어를 만들고, 꾸준히 이 미학을 연구 중입니다. 특히 아사달의 역사와 이미지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입니다. 최근 그분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선전(Shenzhen)에서 아사달의 벽화 이미지를 우연히 보았다고 합니다.
▶ 중국에 아사달의 이미지가 얼마나 많은지 아시나요? 제가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 공항에 내렸습니다. 약 50미터 길이의 대형 광고판이 공항에 있었고 그 광고판이 전부 아사달의 이미지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다음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길 시내를 지나갑니다. 길에 있는 큰 광고판에 아사달 이미지가 있었고, 호텔에 도착해서도 로비에서 아사달의 이미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중국 출장 동안, 거의 수백 번은 우리 이미지를 본 것 같네요.
— 회장님은 아사달의 이미지라는걸 알아보세요?
▶ 그렇죠. 저희는 보면 바로 알아봅니다. 사실 중국에서는 우리가 정식으로 돈을 받고 판 기억이 없어요.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이미지들이 퍼져나갔어요.
중국도 당시 등소평 개혁 이후 서방의 기술과 자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WTO 가입 이후 글로벌 체제에 편입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몇 년만 지나면 생활 수준이 두 배 가까이 올라갈 정도로 성장하던 무렵입니다. 그런 환경과 아사달의 이미지가 딱 맞았던 거죠. 시대적 배경과 저희의 이미지 방향이 겹치면서 자연스럽게 확산이 됐습니다.
다만 우리 이미지가 빠르게 팔려나가 중국에 전파되었지만, 무단으로 유통된 경우가 생긴 거지요. 한번은 변호사를 고용해 법적 대응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해당 이미지들이 아사달의 제작물이며 정식 사용을 위해서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증명을 보냈는데, 그쪽에서는 영수증을 제시하며 합법적으로 구매한 콘텐츠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원래 가격의 10분의 1 수준으로 불법 유통업체를 통해 구매한 것이었습니다. 저희 원본 파일을 복사해서 다시 싼값에 유통된 구조였던 것입니다. 베트남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보았고요, 전반적으로 아시아 전역에 넓게 퍼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쨌든 아사달은 당시 한국의 웹 시장 성장과 시대적 흐름과 맞물려 시장에서 천하통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에너지가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아시아 시장으로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대만에서 저희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대만 1위의 이미지 소스 업체가 아사달과 제휴하여 지금도 매우 큰 매출액을 올리고 있습니다.
— 요즘 젊은 세대들이 이 미학을 향수로 느끼고 동시에 유행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AI의 등장으로 인해 다시 한번 경제적 성장이 있을 시점이기 때문에, 이런 스타일이 다시 유행할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다만 비슷한 스타일의 이미지를 만들더라도 디자인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AI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AI가 이미지를 생성하더라도 결국 레퍼런스가 필요하므로, 아사달 스타일을 기반으로 생성하는 형태도 나오지 않을까 예측하는데, 이 과정에서 저작권 문제 등을 고려하면 대응 방식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AI를 활용해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는 방향까지도 고민하는 상황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신석기 시대의 농업혁명이 인류 역사상 아주 큰 변화 중 하나였죠. 수백 년간 전통 사회가 이어지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나며 현대 문명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 기술이 등장하고, 드디어 AI가 등장했습니다. 이 AI 혁명이 산업혁명과 비교될 만큼 큰 변화라고 생각하고, 어쩌면 산업혁명의 10배에 달하는 사회적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AI가 저희 디자인을 다시 선호할 것이라 예상합니다. 인터넷 혁명이 시작되던 시기에도 긍정적이고 밝은 이미지가 아주 인기를 끌었듯이 AI 역시 미래지향적이고 디지털적인 감각, 환상적이고 사이버네틱 하면서 몽환적인 요소들이 결합하여 있잖아요. 이러한 AI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방향성과 아사달에서 제작했던 이미지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맞닿아 있기 때문에, AI가 이런 스타일을 계속 생성하게 된다면 다시 하나의 트렌드로 형성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또는 저희 스타일이 일부 변경되거나 참조되어 새로운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도 예측합니다.
그리고 지금 AI 이미지는 단순히 정지된 이미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상으로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짧은 쇼츠 형태의 콘텐츠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과거에는 움직임을 이미지에 입히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비용도 많이 들고, 플래시 같은 기술로 약간의 효과를 주는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지를 10초짜리 영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미지를 넣고 영상으로 바꿔주라고 하면 적은 비용에 짧은 제작 시간으로 갈매기가 날아가거나 지구가 회전하는 식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생성되지요.4
이름에 담긴 의미
— 마지막으로, 회사명을 왜 “아사달”로 정하셨나요?
▶ “아사달”은 아침의 땅이라는 순 한국어입니다. 한국 최초의 왕국인 고조선의 수도 이름이 아사달이었습니다. 아사달이라는 그곳에 나라를 세우고 ‘아침 조’에 ‘빛날 선’자를 사용해 朝鮮 조선이 된 겁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거기서 시작됐듯이, 인터넷에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해 보자는 의미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로고에 사용된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자주 찾을 수 있는데요. 하늘에 있는 태양과 지상에 있는 인간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를 상징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왕, 황제, 절대적 존재 또는 태양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고구려가 삼국 시대 국가 중 가장 큰 나라였잖아요. 국가의 강력한 힘과 문화가 밖으로 뻗어나가는 이미지와 잘 맞기에 로고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본 인터뷰는 내용의 명확성과 흐름을 위해 최소한의 편집을 거쳤습니다.
소피 시안(Sofi Xian, 冼納然)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연구자, 문화 이론가, 기호학자이자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이다. CARI (Consumer Aesthetics Research Institute)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양윤선은 독일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디지털 문화와 시각 미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매체와 표현 방식을 탐구한다. 현재 바우하우스 대학교 시각 커뮤니케이션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프루티거 에어로 미학을 주제로 석사 졸업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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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yoKim, 「창업 후 14년에 대한 회고 - (주)아사달 서창녕 대표」, 유튜브, 2013.04.17.
전자신문, 「[2007 상반기 인기상품] 품질우수 - 디자인콘텐츠: 아사달 ‘디자인콘텐츠’」, 2007.06.26. https://www.etnews.com/200706220090
1995년 한국의 정보화 운동의 슬로건.
머니투데이, 「아사달, 'AI프로'에 이미지 기반 AI 동영상 생성 기능 추가」, 2025.07.29 https://www.mt.co.kr/industry/2025/07/29/2025072913224738025









